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의
마지막날은 정말 바쁘게 돌아갔다.

말 그대로 마지막이었기 때문에
지금껏 봐왔던 것들을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목적도 없이 또 밖으로 나갔다.





오늘도 어김없이 플로리다 거리에서
탱고를 추고 계신 분들.

항상 팬 서비를 기가 막히게 해주셨는데
오늘은 내가 카메라를 들었더니
손가락으로 총을 쏴 주셨다.





전에는 산뗄모에서 하고 계시던데..
이번에는 여기에서 퍼포먼스를 하고있었다.

빨간통에 동전을 넣으면
한발짝씩 움직이며 다시 멈춘다.
그 움직임이나 표정이 정말 웃긴다.





한국의 서브웨이는 어떻게 되어있는지 모르겠지만;
저기선 저렇게 길다란 샌드위치를 만들어 줬다.
하나를 둘로 나눈 모습.

아르헨티나에서 먹던
저 얇은 햄과 치즈가 너무 그립다.





그리고 다시, 우리동네의 백화점인 아바스또로.
내가 돌아올 즈음에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하이스쿨 뮤지컬 열풍이 불었었는데
아바스토에서도 홍보 행사를 하고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햄버거.
아바스토 백화점에서, 그것도 장사가 안되는 곳인데
맛있게 보여서 주문했는데 이렇게 맛있는건 먹어보질 못했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서.
내 비행기는 새벽 출발이라 밤을 새서 가야만 했다.
그리고 저녁에 다른 사람과의 약속이 있어서 나가던중..

내 귀여운 친구들이 자신들도 나가서 내일 들어온다고 했다.
6개월정도로를 함께 했었는데..
아, 지금이 우리의 마지막이구나..

그만 기분이 울컥해져서
꼭 껴안고 울어버렸다.

잘 지내라구!
너희들이 정말 그리워.





나의 친한 친구한명은 다리를 다쳐버려서
계단이 많은 호스텔에 돌아오지 못하고
친구집에서 잠깐 머물렀었다.

극적으로 돌아오기 하루전에 연락이 되어서
그 친구집으로 찾아갔다.

우리 호스텔의 거의 모든 친구들에게 생일 파티를 해줬는데
볼리비아&페루 여행때문에 이 예쁜 친구에게는
파티를 해주지 못해서 이날 케이크를 사들고 갔다.

친구는 의자에 다리를 얹어놓고 있는 모습으로
나는 기부스에 한글로 elida에게 하고 싶은 말을 써주었다.
너무너무 좋아한다고!

그리고 우린 작별을 했다.





저녁을 보내고, 새벽이 되고
나는 무거운 짐을 들고.. 공항으로 갔다.

헤어짐이란 너무 아쉬운 법.
사람들과의 헤어짐도 힘들었지만
정들었던 이곳을 떠나는것도 너무 힘들었다.

공항에서 함께 했던 언니와 헤어질때부터
눈물이 나기 시작했는데 한국에 도착할때까지
그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시원함과 섭섭함.

너무 미웠던 이곳, 또 내가 너무 좋아했던 이곳.
난 한국에서 또 다른 생활을 시작하겠지만
여기서의 기억들은 절대로 잊을 수가 없다.
,
거대한 마추픽추를 여기저기 쏙쏙 돌아다녔다.





우린 야마만 쳐다보다 저 밑으로 내려가 버렸기 때문에
뒤에 보이는 무시무시한 계단을
다시 올라가야만 했다.





마추픽추의 정돈된 모습들.





이곳은 대광장.
중간에 위치한 곳으로 사람들이 가장 많다.





세 창문의 신전





가장 위에 위치한 해시계.
예전엔 만질수도 있었는데 요즘엔 안된다고 했다.
저렇게 줄까지 쳐놨었다.

이 뒤로는 어디로 가야하는 지를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었는데
좀전에 보았던 일본인 가이드를 다시 찾게되어
그들이 가는 길을 따라갔다.





이 바위가 유명한 이유는
신기하게도 뒤에 보이는 산과 같은 모양을 지니고 있어서다.





13개의 꼬부랑길.
우리가 버스를 타고 올라왔던 길인데
트래킹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저 길을 걸어온다고 했다.





콘도르 신전





콘도로 신전 앞에 있던 돌
옆으로는 감옥으로 추정되는 바위도 있었다.

마추픽추를 다 구경하고 난 뒤
우리는 준비해온 바나나와 귤을 먹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를 타고 13개의 굽은길을 내려오는 중에
계속 우리차를 따라오며 소리를 지르는 아이가 있었다.

우리가 길 하나를 꺾을 동안 아이는 지름길로 먼저 뛰어 내려왔다.
이렇게 총 13개를 내려왔다.





마지막 길에서는 차를 세우고 아이를 태웠다.

아이는 반가웠다, 잘가라는 그런만을 크게 소리쳤고
버스 안의 사람들은 모두 함께 박수를 쳐줬다.

허전할 뻔 했던 마추픽추의 마지막을
아이가 멋지게 장식해 주었다.





모자를 쓴 아이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잠깐 학원에 다닐때
우리반에 있었던 이스라엘 친구 yotam.

한달 남짓 만나고 헤어졌었는데 여기서 만나버렸다.

내가 맨날 숙제검사도 해주고 틀린건 가르쳐주기도 했었는데
마지막 테스트에서 난 7점, 이 친구를 10점을 받았었다.

너무 똑똑해서 부담스러웠던 친구인데
그땐 이 친구와의 헤어짐이 기쁘기만 했었는데
세상이 너무 좁은지라 이 머나먼 마추픽추에서 만났다.
,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버스가 거의 다 좋은 편이고,
볼리비아의 버스가 거의 다 안좋은 편이라하면,
페루의 버스는 지불하는 값만큼의 질을 누릴수가 있었다.

푸노는 페루의 첫 도시였기 때문에 어떤곳이 좋은지 몰랐기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행사에서 버스를 예약했고
터미널에서 우리는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보통 아이가 있는 사람이라면 표를 끊지 않고
한 자리에 같이 앉는게 보통이었는데
이 버스는 냄새가 심하게 났으며 뒤로 잘 젖혀지지 않았는데다
통로에는 온통 짐을 들고 탄 아이가 있는 어머니가 차지해버려서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게다가 그 어머니들은 앉아있는 사람의 다리에
기대어 잠들곤 했다..

밤새도록 너무너무 힘들게 도착한 쿠스코.
새벽 4시에 도착한 바람에 버스에서 새벽을 지새고 밖으로 나갔다.





쿠스코의 철자는 cusco, cuzco 둘다 사용할 수 있지만
난 내가 좋아하는 cuzco를 주로 쓴다.
(나스카도 마찬가지!)

쿠스코는 잉카시대의 수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거대한 관광도시가 되어있는데
매달 조그마한 행사를 펼친다고 했다.

우리가 도착한 8월에는 작은 퍼레이드가 열렸다.





plaza de armas

아르마스 광장에 들어서니 대성당이 한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종이같은 표를 하나 사면 쿠스코의 거의 모든 유적을
볼 수 있다고 했는데 그 당시 가격이 무려 22,000원 정도였다.





아르마스 광장 왼쪽에 있는 헤수스 종탑교회.

여기 옆에 앉아있다가 한국인 한분을 만났다.
여행중에 딱 두번 한국인과 부딪쳤었는데 이때가 처음.
잠시동안 아저씨와 얘기를 나눴는데
알고보니 쿠스코 한식당의 주인아저씨셨다.

너무 반가운 마음에 저녁은 김치찌개를 먹기로 했다.





찾기 어렵다는 얘기를 듣고 갔던 12각의 돌.

도착하기도 전에 사람들이 몰려있는 모습을 보았고
다들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우리도 줄에 합류.
우리 두명 뒤에는 일본인 여자가 두명이 있었는데
그 뒤의 남자 아이들이 누가 더 이쁜지 얘기를 하고 있었다.

우린 그걸 엿듣고 우리가 더 이쁘다고 말을 걸었다.
어이없어 웃고 있는 남자아이들과 얘기를 하다가 어느덧 친해져서
그 뒤로 우리는 쿠스코를 떠나는 날까지 함께 했다.





호세, 프리츠, 나를레스.
셋 다 페루인이다.

한적한 골목길안으로 들어가서 괴상망칙한 사진을 찍어버렸다.





밖으로 나가서.. 대성당 앞에 도착했다.
나를레스의 모자는 내가 뺏아버렸따.
,

나의 친구는 플라멩고와 벨리댄스학원의 선생님이었는데
마침 공연이 있다고 우리를 초대해 주었다.

라파스의 zona sur에 있는 행사장에서는
이름은 fi paz - feria internacional la paz의 줄임말.

여러 회사들이 나와서 자기들 물품을 홍보하는
박람회 같은 행사였는데
친구도 여기서 학원 홍보를 한다고 했다.





공연시간까지는 조금 시간이 남아서
행사장 여기 저기를 구경했다.

예쁜 가방을 팔고도 있었고
암튼 신기한 아이디어 제품들도 상당히 많았다.

한 페인트 회사에서는 자신들의 제품으로
그림을 그려주었는데 사람들이 이 그림을 받으려
줄을 서있었고 나도 한참 기다려서 그림을 받았다.

저기 그리고 있는 작품이 나의 것.





행사장의 입구..바로 옆,
기념촬영





드디어 친구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친구의 나이가 30이 넘었었는데..
뭐 여기선 누구라도 다 친구니깐 그저 반말을 하고
다니니깐 너무 편했었다.





그리고 학생들의 공연





벨리댄스.
요즘은 한국에서도 많이 봤는데
난 저때 저걸 처음 봤었다.

연습실에서 저걸 휘두르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너무 예뻐서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학생들의 공연.
맨앞의 백인은 미국인인데 방학동안
볼리비아에 놀러와서 댄스를 배우고 있었다.

하지만 춤은 너무 뻣뻣했다.

저 꼬마 아가씨는 신기했는지 계속 나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면 씨익 웃으면서 도망가버리고..
나중에 내가 가진 초콜렛을 하나 꺼내 주었더니
눈웃음을 치면서 인사를 했다.





공연이 끝나고 우리는 친구에게 예쁜 꽃바구니를 선물했다.
그리고 남자친구와 함께-





친구의 딸 브렌다와 아들인 알렉스.

라파스에서의 기억은 소중한게 너무 많다.
친구의 남자친구네 가족들과 파티도 했고
또 친구의 가족들과 공원으로 산책을 가기도 했고
어머니가 직접 만들어 주신 taco도 먹고
풀코스로 나오는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식사도 하고..

그리고..
이 모든 기억을 가지게 해준
이제 다시 만날수 없을지도 모르는
친구와 아쉬운 이별을 했다.

,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함께 살던 친구는
북쪽은 물가가 훨씬 싸다고 말을 했었는데
언제부턴가 그 물가에 적응해 버렸다.

내가 집처럼 지내던 부에노스 아이레스 호스텔은
하룻밤에 27peso였는데
살타에서는 18peso,
그리고 여기에선 어느덧 10peso가 되었다.
물론 공동욕실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우리가 묶는 숙소의 바로 옆방에는
캐나다, 그것도 몬테리올 출신의 친구가 묶고 있었다.
혼자 여행중이었는데 심심하다고 해서 마을 시작했는데
어느샌가 이곳에선 함께 어울려 다니는 친구가 되었다.

캐나다인이지만
프랑스어를 쓰는 아이.





좋은 레스토랑을 안다고 함께 가자고 했다.
호텔의 레스토랑이었는데 상당히 분위기가 좋았다.

그리고 blognesa(고기+토마토)소스를
한번도 먹어본적이 없었는데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주문한 pasta는 너무 맛있어서
그 다음부턴 난 꼭 저 소스의 파스타만 먹었다.





다음날 아침,
광장을 돌아다니다 엠빠나다(만두)를
항아리에서 바로 튀겨 파는 곳을 발견했다.

4개에 1peso였기 때문에 사람들도 굉장히 몰려들었다.
하지만 맛은 못먹을 정도였다는거.





북쪽지역은 거의 아는 사람이 소개해준대로 다녔다.
우마우아까에 대해 들은 이야기라면
정오에 교회에서 종이 울린다던데
그걸 사람들이 보려고 모인다는 것이다.

잔뜩 기대를 하고 달려갔다.





정오가 되니 끼익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둥그렇게 덮혀있던 갈색문이 열렸다.

그리고 약 2분정도
종이 울리는 동안 저 사람이 얼굴을 숙이고
손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것.

종소리가 끝나고 문은 스르륵 닫혔고
사람들은 전부다 박수를 쳤다.
음...





작은 마을이라 특별히 할게 없었기 때문에
캐나다인 친구와 마을 저 앞에 보이는
산에 오르기로 했다.

산은 산이고
얼굴은 타지말아야 했기 때문에
잠깐 모자를 사러 돌아다녔다.

그리고 잉카의 국기가 그려진 하얀 모자를 샀다.





산은 생각만큼 건조했으며
바람은 불지않고 마른 흙으로 이루어져
헛디디면 작은 돌이 미끄려져 몸도 미끄려질 정도였다.

급격한 경사를 힘들게 올라갔고

우린 드디어 정상에서
저 멀리 있는 마을을 내려다 볼 수가 있었다.





산에서 내려와서 제대로된 엠빠나다를 먹으러갔다.
지금까지 먹은 엠빠나다 중에 가장 맛있는것.

목이 너무 말랐는데
짠돌이 캐나다친구 덕분에 음료는 주문하질 못했다.
그래서 숙소에 돌아갈때 음료수를 잔뜩 사들고 갔다.





해질녘이 되어서야
항상 지나쳤던 이곳에 가보게 되었다.

어딘지도, 무엇인지도 모르는 곳이지만
마을의 상징인듯한 이곳엔
항상 왔다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

인디아 게이트

from = asia =/* india 2008. 1. 19. 17:34

드디어 마지막코스인 델리에 왔다.
집에 가져갈 선물을 위해
하루를 쇼핑에 투자했다.





가방과 보석함 등등을 파는 장인 할아버지의 가게에 왔다.

같이 있었던 언니가 예전에 이곳을 들른적이 있어서
할아버지는 굉장히 반가워 하셨고
물건을 정말 싼가격에 주셨다.

할아버지의 손자들은
정말 귀공자의 느낌이 났다.





밤에 시간이 남아 어디갈까 생각하던차에 결정한곳.
역시 인디아 게이트는 밤에 봐야 한다.

인디아 게이트 저 뒤로 떠있는 달까지
정말 그림같았다.





밤인데도 불구하고 앞은 수많은 나들이객으로 붐볐다.
여기서 만난 대가족들과도 인사를 하고.





가까이에서 본 인디아 게이트

,

아그라까지 오는길엔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분명히 어제 터미널에서는 7시 출발이라고 하였는데
미리 터미널에 도착하고 나서 들은 이야기는 7시 30분이라는 것이다.
아침의 30분이 얼마나 소중한 건데 말이지.

아그라의 버스는 인도여행을 하는동안 탔던 버스중에 가장 열악한 환경이었다.
철조물을 갖다 붙여 만든듯한 버스는 어쩐일인지 잘만 굴러다녔다.
단, 포장 도로에서도 철조각들의 흔들거리는 소리는 절대로 그치지 않았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즈음
우리 버스에는 기사부터 안내원, 손님, 심지어는 짐조차도 남아 있질 않았다.

그와중에 옆의 출발하기 직전의 기사는 우리에게 다가와 아그라에 가냐고 물어봤다.
그렇다고 했더니 버스를 체인지 하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버스가 바뀌었다고 생각을 하고

우린 무거운 배낭을 들고 좁디좁은 버스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출발한지 20분정도가 되었을때 안내원은 돈을 내라고 했다.
분명 잔시에서 아그라까지의 요금을 지불했는데..
이미 냈다고 하니 그건 조금전의 버스이고 이 버스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당신이 버스를 갈아타라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말하니
돌아오는 대답은 갈아타라고는 말을 했지만 선택은 너희가 하는 것이다.
정말 큰것을 깨달았고 일단 탄 구간만큼의 금액은 지불하고
뒤에 따라오고 있는 우리의 버스로 다시 갈아탔다.

 




아그라 포트역에서 만난 스님은 감기가 걸렸는데 약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건강하고 건강한 나는 과감히 내 약의 3분의 2를 떼드렸다.
약을 준것에 대해서는 후회가 없었지만 나중에 감기에 걸리고 나서는 이 약이 아쉬워졌었다.

난 여행을 다닐땐 절대로 한국음식은 먹지 않겠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뜻대로 안되는 곳이 바로 인도인 것 같다.
아그라 역시 카주라호 처럼 한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식당이 굉장히 많았다.

인도 음식이 다양하지 않은 관계로 한참을 질려했던 우리는
가장 유명하다는 가게로 들어가 오므라이스를 주문했다.
살기위해 먹으려고 했던 오므라이스는 의외로 맛있어서 고생했던 아침을 싹 잊게해주었다.


 


 


 

 

 



나와 함께 다닌 언니는 사진찍는 것을 좋아했는데
작품을 보면 이런사람 저런사람 죄다 사람만이 찍혀있었다.
자연도 관광지도 좋지만 사람에게서 풍기는 매력은 분명 그것들과는 달랐다.

저녁이 되어 무얼할까 생각한차에 뒤에있는 시장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거대한 시장은 갖가지 풍경을 다 만날수 있었다.

 

 

 

 

 


그리고 항상 카메라를 보면 쫓아오는 아이들.

꾸임없는 아이들의 미소가 너무 아름다웠다.


 

 


카메라를 보고 졸졸 따라오면서
찍어주겠다고 하면 딴청부리는 새침떼기 꼬마.


 



옆의 약국엔 사진찍지 말라고 호통치는 아저씨가 있었고
여기 약국엔 우릴 즐겁게 바라봐주는 아저씨가 있었다.





우리가 묶은 라즈 호텔의 주인 아저씨.
한국인들이 쓴 방명록을 보여주며 자랑거리라고 으쓱대셨는데
정작 방명록에는 '잠만 자고 버스는 예약하지 마세요'
'아저씨 돈 관계에서 사기를 잘 치니깐 조심하세요'라는 의외의 문구가 가득했다.

차마 아저씨에게는 알려줄 수 없었지만..

,

비가 그치고 사원을 빠져나왔다.


 



한국인을 많이 만나본 카주라호의 사람들은 다들 한국말로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특히나 우리 일행은 여자뿐이었기 때문에 지나가는 꼬마들 까지도 말을 걸고 지나갔다.
지긋지긋한 현지인들의 한국말에 기분도 상하고 열도 꽤 받았을 즈음
우리에게 다가온 아이들은 의외로 우리의 기분을 풀어주었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인도사람들은
카메라만 보면 다가와서 사진 찍어달라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에게 다가온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 였는데 순수해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나 좋았다.

하지만 이 순수한 아이들이 우리의 모습을 보고 또 다르게 변할까 두려운 생각도 들었다.
지금 내가 맘에 들어하지 않는 인도의 모습도 대부분 관광객이 만들었을 것인데
나도 그 중 한 사람이 되어버릴까 두려웠다.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아이들은 마냥 즐거웠나 보다.
자신의 집을 보여주고 싶다고, 시바를 본적이 있냐고,
본적이 없으면 우리집에 있는데 보여주겠다고.

미안한 마음이 잔뜩 들었지만 그 마음만은 받아들였다.


 


 



카주라호에서는 적어도 2박 3일은 있자고 생각했었는데
관광객에 그것도 한국인에게 찌들여 버린 카주라호 모습에
우리는 일찍 뒤돌아 서게 되버렸다.

인도의 버스는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안좋았다.
저런 버스를 타고 10시간씩 다닌걸 보니 우린 참 대단했다.

아침일찍 버스를 타기위해 나섰는데 버스는 오질 않았고 오후 버스를 타야만 했다.
덕분에 미리 끊어둔 기차표는 환불을 했고 아그라로 가는 버스조차 놓치고 말았다.

 

 


 

 

 

 

 

버스터미널 근처에는 항상 사람이 붐빈다.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난다.

 

 

 

 

버스표를 검사하는 아저씨.

 

 



잔시로 가는 버스 안.
물을 파는 꼬마들 역시 사진을 찍어달라고 졸라댔다.
자신들이 찍혀있는 사진을 보고 나면
이 아이들은 물을 파는게 신경쓰이지 않을 정도로 좋아했다.

 




그 누구도 자고 가지 않을 잔시에서의 하룻밤.
잔시는 관광객이 없는 탓에 호텔에 흔하지 않았고 호텔은 하루에 600루피 정도를 요구했다.

그 와중에 만난 한 아저씨는 끈질기게 우리에게 따라 붙었다.
언뜻보면 사기꾼처럼 보였는데 도와주겠다고, 필요한게 머냐고, 또 원한다면 저렴한 호텔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한시간이 넘도록 그 사람과 티격태격 댔었고 그 사람은 300루피짜리 호텔을 알려주겠다고 하고
우린 결국 따라가게 되었다.

아저씨는 오토릭샤꾼이었는데 운전중에 보여준 종이에는
아저씨를 거쳐간 수많은 한국인들의 칭찬 메세지가 담겨있었고
난 미안한 마음 고마운 마음을 함께 가지게 되었다.

이윽고 도착한 호텔에서는 방값이 500루피라고 했다.
속았다라는 기분이 들 찰나에 바라본 아저씨는 주인에게 가서 조용하게
'한국아가씨들에게는 방을 300루피로 해줘라'라고 말을 하곤 떠났다.

우린 정말로 300루피에 묶었다.

여기 호텔은 어린 애들 두명과 젊은 애들 두명정도가 일을 하고 있었는데
언뜻보면 어설퍼 보였지만 마음은 정말 착한 아이들이었다.
바보같으면서도 순진한 아이들.

우린 다음날 새벽에 아그라에 가기위한 버스를 타러 갈때도
여기 호텔의 오토릭샤를 타고 갔다.
굉장히 먼 거리를 굉장히 싼 값에 태워주었다.

,

여행을 하면서 즐거운 일이란건
관광지를 봤을때,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때 등등의 많은 일들이 이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즐거운건 사람과의 만남이 아닐까 싶다.

 

 



가트의 이곳 저곳을 다닐때 만난 아이.
인도에서 한달동안 만난 사람중에 가장 잘생긴 외모를 가졌다고 생각했다.

이 아이와는 저쪽 밑에 가트까지 같이 갔었다.
헤어질땐 함께 사진도 찍었다.

 

 



다사스와메드 가트에서 만난 친구다.
가트에서 놀고 있을때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와서는
예전에 한국인 친구가 있었다고 나랑도 얘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짧은 영어실력에 할수 있는 말도 별로 없었지만
이 친구는 상당한 영어실력을 가지고 있어서 나한테 이것저것 얘기를 하기도 했다.
바라나시에 있었던 4일간의 시간 동안 이 친구는 매일마다 우연히 마주쳤고

하루에 두번 이상 만난적도 있었다.

나와 저 사진을 찍고 나서 사진을 보내달라고 하길래
종이에 주소를 적어달라고 했더니 아주 당연하게 집주소를 적어주었다..

여담이지만, 매일 가트에서 놀고 있길래
여러가지를 물어보았는데 결혼은 했고 딸이 한명 있으며
직업은 손금을 봐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오토릭샤를 타고 사원들을 다녀 오는길에 만난 주유소 직원.
기름을 넣는 동안 이친구 사진을 여러장 찍었는데
자기가 알아서 여러가지 포즈를 취해 주었다. 본건 많았던듯 싶다.

 

 



한국인이라면 다 가봤을만한 가게인
미키네의 주인 미키와 헬핑보이.

저런 가게가 있는 줄도 몰랐는데 바지를 사러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참에 맘에 드는 바지가 있어서 들르게 된 곳이다.
그땐 그저 바지를 사기 위해 들어갔었는데 알고보니 한국 사람들에게 상당히 유명한 집이었다.

미키는 한국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많은 아이 였는데
이곳을 찾는 한국인 관광객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해서는
왠만한 대화는 가능할 정도로 실력을 갖추었다.

미키네에 들르면 항상 짜이를 대접해 주는데
이런 미키가 너무 좋아서 거의 매일 미키네를 방문해서
농담도 주고 받고 손님도 소개해주고 많은 일이 있었다.

두달 후면 한국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얘기했었는데 다녀 갔을까.....?




 



인도에 와서 2일동안 인도음식을 먹지 못했었다.
여기저기 물어본 결과 탈리라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했다.

어디가 레스토랑인지도 모르겠고..
식당으로 보이는 곳은 다 들어가서 탈리를 외쳐댔다.
사람들이 옆집으로, 또 옆집으로 가라고 알려줘서 도착한 곳은 탈리를 파는 곳이라고 했다.

저 인상 좋아보이는 아저씨는 허허허 웃으면서 우리를 반겨주었는데

의심많은 우리는 들어가기 전에 가격먼저 물어봤다. 가격은 피프티, 50루피라고 한다.

전 날 먹었던 탈리가 100루피였던지라 굉장히 저렴하다고 생각했고 안으로 들어갔다.


접시 한가득 밥과 짜파티, 그리고 탈리를 올려주었다.
나올 때 150루피를 주니, 하하 웃으며 피프티가 아니라 피프틴이라고 한다.
저 밥값이 무려 1인당 15루피였던 것이다.

너무 맛있고 인심이 좋은 그곳을
바라나시를 떠나기 전에 다시 한번 들렸다 갔다.


 



미키네로 가는 골목은 수많은 가게들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었다.
여러가지 악세사리들을 팔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난 인도에 온 기념으로 
빈디(이마에 붙이는 점)를 사기로 했다.

빈디의 종류를 헤아릴수 없을 만큼 다양했으며
난 기본적인 까만점부터 시작하여 반짝이는것, 주렁주렁 달린것 등 재미있는것을 많이 샀다.

그리곤 말도 통하지 않으면서 빈디가게 주인과 계속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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